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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컬처톡톡]
갈수록 더 정교해지는
오피스 드라마의 본색
“준비하시고… 쏘세요!” 두구두구 울리는 북소리가 긴장감을 만들고 날아간 화살이 회전판에 꽂힐 때마다 탄성과 탄식이 오간다.어린 시절 TV로 주택복권 방송을 온 가족이 모여 보던 광경이다.당시 저소득층의 주거안정 지원을 목적으로 발행한 주택복권은 1등 당첨금이 300만원으로 당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하지만 현재 복권의 대명사는‘주택복권’이 아니라 2002년에 출시된‘로또’다.1등 당첨금 제한도 없어졌고,당첨자가 없으면 다음 주로 이월되는 제도가 있어 대한민국 복권 사상 최고액인 407억원 로또 당첨자가 탄생하기도 했다.집 몇 채가 아니라 실제‘인생 역전’을 할 수 있는 액수다.그래서‘로또’는‘인생 역전’과 동의어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평균 실수령액이 14억원 정도다.복권 가격이 인하된 데다 구매자가 급증해 1등 당첨자가 늘면서 생긴 변화다.이제 로또 당첨은‘인생 역전’은커녕 아파트 한 채 사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는 이런 현실이 담긴 오피스 드라마다.홍성 인터내셔널 영업5팀장인 공은태(이준혁)는 어느 날 편의점에서 거스름돈 대신 받은 로또가 1등에 당첨된다.세금 제하고 실수령액 13억원.당장 회사를 그만둘까 생각도 해보지만 현 부동산 시세에 그 돈으로 아파트나 상가를 사는 건 무리다.마침 상가를 알아보러 간 부동산에서 주인이 하는 말이 공은태의 마음을 바꿔 놓는다.대뜸 연봉을 물어봐 한‘7000쯤’된다고 공은태가 말하자 뜬금없이 “몸값이 30억이 넘는 분”이 오셨단다.세금과 비용 다 빼고 월세로 연 7000만원을 벌려면 적어도 30억원짜리 건물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데서 나온 이야기다.그러면서 말한다.“요즘 사람들 로또 많이 사죠?그게 다 자기 가치를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결국 공은태는 로또 당첨 실수령액 13억원이 통장에 찍혔지만 회사에 출근한다.로또에 당첨돼도 변한 건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통장에 찍힌 13억원이 그의 직장 생활을 바꾼다.위에서는 찍어 누르고 아래서는 치고 올라오는 그 중간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감정 없이 기계처럼 살아가던 그는 이제‘화를 낼’여유를 갖게 된다.시키는 대로 적당히 살아왔던 그는 이제 할 말은 하고 소신대로‘사고도 치는’사람이 된다.그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목표도 없이 살던 그에게‘로또 1등’은 인생 역전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든다.일터는 이제 그저 월급 주는 곳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게 해주는 곳이 된다.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라는 드라마는 이처럼‘로또 1등’보다‘출근’에 방점이 찍히는 오피스 드라마의 본색을 드러낸다.로또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대신 홍성 인터내셔널이라는 해외 의류 브랜드를 수입해 유통하는 중견 규모의 패션 무역 유통 기업의 디테일한 일의 세계가 그려진다.한때 친했지만 퇴사 후 동종 회사를 차린 직장 선배와 살벌한 회사 간 전쟁이 펼쳐지고,막내 직원이 계약서 주문 수량에 실수로‘0’을 하나 더 붙여 벌어진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그래서 로또 1등 당첨이라는 설정은 마치 이 패션 무역 유통기업에서 벌어지는 디테일한 사건들을 의욕적으로 해결해 가는 주인공의 달라진 입장을 위해 넣어진 것처럼 보인다.어째서 이 드라마는 로또 1등이라는 엄청난 횡재보다,오히려 일과 자아실현에 더 집중하고 있는 걸까.여기에는 로또 당첨이 인생 역전이 되지 못하는 경제적 현실과 더불어 그만큼 중요해진 직업에 대한 갈망이 깔려 있다.
이런 욕망은 과거보다 훨씬 디테일한 직업의 세계를 그리는 최근 오피스 멜로드라마들의 경향에도 나타난다.이제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직장은 그저 남녀가 만나는 배경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예를 들어 현재 방영되고 있는 KBS 주말드라마‘너 말고 다른 연애’의 남자주인공이 일하는 대기업 제과회사 이야기가 그렇다.맛있는 과자를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회사원들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생산과정에서 외주업체와 얽힌 비리 같은 디테일들이 이 드라마에 들어 있다.무엇보다 10년 장기 연애를 한 남녀의 최대 갈등 원인이 대기업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자주인공과 아직 장편영화 데뷔를 못해 불안정한 여자주인공 사이의 현실 격차다.안정된 직업은 이제 사랑과 결혼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됐다.
물론 안정된 직업을 갖는다 해도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샐러리맨이 아닌 자아실현의 문제는 또 하나의 갈망으로 등장한다‘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의 공은태 팀장이 그러하듯이,종영한 드라마‘내일도 출근’의 여자 주인공 역시 일에 대한 설렘이 사라진 권태기를 겪는다.AI 홈 시대에 맞게 홈 오토메이션 시스템을 고안하는 전자회사의 이야기가 리얼하게 들어간 이 작품은,이승철 도박그래서 판타지적인 남자주인공을 통해 일과 사랑 모두에서 설렘을 갖고 싶은 여성 회사원들의 로망을 담았다.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패션디렉터로 있는 회사에 들어간 한 신입 사원의 이야기를 그린‘최애의 사원’도 마찬가지다.패션업계의 치열한 마케팅 전쟁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이 드라마는 설렘이 없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스타트업에 들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시작한다.이처럼 오피스 멜로 드라마가 사랑만큼 일의 디테일과 그 로망을 담기 시작한 건,사랑만큼 일에서의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는 현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실제로 작년 국민통합위원회가 25~44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청년기에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일(38.1%)’이 꼽혔고,그다음으로‘여가,자아실현 등의 개인생활(23.1%)‘연애,결혼 등 파트너십(22%)’이 그 뒤를 이었다.이제 젊은 세대에게 절실한 건 로또 복권도,사랑도,결혼도 아닌 일이다.그런데 그 절실한 일터에서 설렘을 느끼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그래서 그 결핍을 채워주는 판타지 드라마가 많아진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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