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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Why]
우크라戰 본 국민들
‘강경한 중립국' 반대

'중립성 수호 국민투표'를 앞둔 스위스의 한 도로에 "전쟁에 반대" "중립적인 스위스에 동의"라고 적힌 포스터가 걸려 있다.이날 진행된 투표는 반대가 약 70% 나와 부결됐다./EPA 연합뉴스
'중립성 수호 국민투표'를 앞둔 스위스의 한 도로에 "전쟁에 반대" "중립적인 스위스에 동의"라고 적힌 포스터가 걸려 있다.이날 진행된 투표는 반대가 약 70% 나와 부결됐다./EPA 연합뉴스

자유 진영의 본고장 서유럽에 있으면서도 유럽연합(EU)이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들어가지 않고,유엔에도 21세기가 돼서야 가입했던 스위스의‘절대 중립’외교 노선이 흔들리고 있다.스위스의 중립 노선을 더욱 강화하자는 취지로 발의된 국민투표가 압도적으로 부결된 것이다.이에 따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탈(脫)중립 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틀기 시작한 스위스의 태세 전환에 더욱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우파 시민단체‘프로 슈바이츠(스위스를 위하여)’의 발의로 지난 27일 실시된‘중립성 강화 개헌안’국민투표가 70.15%의 압도적 반대로 부결됐다.스위스는 1874년 도입한 국민투표를 통해 중요 국가 정책의 방향을 정해왔다.여성 투표권이나 유엔 가입 같은 중요한 시책부터 징병제 폐지,이민 제한 도입,성소수자 차별 금지법 제정 등 찬반이 팽팽하게 갈리는 사안도 국민투표를 통해 도입 여부를 정했다.헌법개정안 국민투표의 경우 18개월 내 유권자 10만명의 서명을 받으면 실시할 수 있다.

이번에 투표 대상이 된 개헌안의 골자는 스위스의 중립 노선을 더욱 강화하는‘교조적 중립(Absolute Neutrality)’이다.스위스가 특정 국가 등을 겨냥한 국제 제재에 동참하려면 유엔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직접 공격받지 않는 한 나토를 비롯한 군사 동맹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담겼다.중립을 유지하면서 외국과 협력해 안보를 강화하고 제재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현 안보 기조에서 탈피해 아예 “영구적인 무장 중립”을 헌법에 명시하도록 해 고립주의 색채가 가미됐다.이런 개헌안에 국민 열명 중 일곱명이 퇴짜를 놓은 것이다.

스위스의 중립 외교 노선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담은 헌법 개정안이 27일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이 전해지자,이 개정안에 반대해 온 스위스 정치인들이 밝게 웃고 있다./EPA 연합뉴스
스위스의 중립 외교 노선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담은 헌법 개정안이 27일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이 전해지자,이 개정안에 반대해 온 스위스 정치인들이 밝게 웃고 있다./EPA 연합뉴스

스위스 언론들은 이 같은 투표 결과를 두고 “국민들이 상황에 따라 서방과 공조한다는‘유연하고 연대적인 중립(Flexible·Cooperative Neutrality)’을 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중립국’이라는 타이틀은 유지하면서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겨냥한 EU의 경제 제재에 동참하고,슬롯 용가리나토와 합동 군사 훈련 및 정보 공유를 실시해 온 기존 정책이 더욱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중도보수 성향인 중도당 소속 마리안느 빈더-켈러 상원 의원은 SRF 방송 인터뷰에서 “스위스가 서방의 규칙 기반 안보 체제의 일원이며,협력 파트너로서 국제법 위반 시 제재에 참여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스위스의 절대 중립 역사는 6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3~16세기 세력을 키운 스위스 연방이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패배한 것을 계기로 대외 팽창 정책을 멈추고 평화 조약을 체결한 것을 중립의 기원으로 본다.이후 거의 모든 유럽이 휩쓸린 30년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중립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졌고,1815년 빈 회의에서 유럽 열강들로부터 중립국 지위를 공인받았다.1848년 연방 헌법에 중립성을 명시하면서 200년 가까이 국제 사회의 중재자이자 안전핀 역할을 해왔다.

그래픽=백형선
그래픽=백형선

유럽 전역이 1·2차 대전의 불길에 휩쓸리는 중에도 스위스가 중립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 동력으로 강력한 방위력이 꼽힌다.스위스는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징병제(남성)를 운용하고 있으며,알프스 산악 지대 곳곳에 지하 벙커,포대,탄약고 등을 만들며 국토를 요새화했다.F/A-18 전투기,레오파드 2A5 전차 등 다수의 재래식 무기를 운용하고 있다.유사시 자국 방위만큼은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평가 속에 특정 진영에 대한 의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스위스의 중립 노선에 변화를 가져왔다.스위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나흘 만에 “유럽 역사에 전례가 없는 국제법 위반 행위이자 인도주의적 재앙”이라면서 EU의 대러 제재에 참여했다.스위스 외교부는 “중립은 불변의 원칙이 아니고 오히려 외교,안보와 경제 정책의 도구로서,현재 처한 정치적 환경에 맞춰 조정돼야 한다”고 했다.절대 중립 노선에서 탈피해 국가 안보 상황에 맞춘‘유연한 중립’방침을 천명한 것이다.핵 보유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고 주요 지역을 점령하는 모습을 지켜본 스위스가 집단 방위 동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선 스위스의 중립국 정체성 자체에 변화가 올 가능성도 제기한다.스위스처럼 강력하지는 않아도 중립국으로 자유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사이 중재자를 자임하던 북유럽의 스웨덴·핀란드가 러시아 침공 위협에 아예 중립국 정체성을 버리고 나토 군사 동맹의 일원이 된 전례가 이미 있다는 것이다.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북유럽 중립국의 연이은 나토 가입에 이어 스위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보다 유연한 중립 노선을 택한 흐름을 짚으며 “유럽 대륙에 중립이라는 어정쩡한 중간 지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나토 대 러시아’라는 이분법적 신냉전 안보 재편이 완성됐다”고 분석했다.

스위스에선 11월 무기 수출 규제 완화와 관련한 국민투표가 예정돼 있다.그동안 스위스는 자국산 무기나 탄약을 구매한 독일,스페인 등이 이를 분쟁 지역으로 재수출하는 것을 절대 불허해 왔다.그러나 구매 후 5년이 지나는 등 일정 조건하에 우크라이나 같은 침략 피해국으로의 재수출을 허용할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이 투표 역시 스위스 중립노선의 근본적 변화 여부를 결정할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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