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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맛보는 역사,역사로 배우는 커피] 덕수궁 돌담길에 얽힌 스토리.도시전설도 문화유산이다
정동과 덕수궁은 내가 좋아하는 답사 장소다.교육학이나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도,커피 역사에 관심 있는 성인들에게도 걷고 즐기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다.이곳은 우리나라 근대 문화유산 답사 일번지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다.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구의 외교관,선교사,의료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정동이었고,당시 새로 등장한 전차의 서쪽 출발지와 경인선,위 믹스 상장 폐지 업 비트경의선 등 기차의 시발과 종착 정거장도 정동에서 가까운 서대문과 염천교 사이에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종 임금이 일본의 위협을 벗어나고자 1896년 2월 서양 공사관이 밀집해 있던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의 무대로서의 정동이다.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을 머물렀던 고종은 1897년 2월 덕수궁으로 환궁하였고,그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등극하였다.이후 10년 동안 정동의 덕수궁(당시 명칭은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명실상부한 정치 일번지였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판매한 첫 번째 기록을 남긴 독일 상인 골샤키 상점이 있었던 곳도 정동이고,골샤키 상점의 커피 판매 광고를 게재했던 <독립신문> 사옥이 있었던 곳도 덕수궁 남쪽 돌담길 근처였다.당시 지도에는 덕수궁 남쪽 돌담길을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로,덕수궁 북쪽 돌담길을 '가구거리(Furniture Street)'로 표기할 정도로 근대 문물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던 곳도 정동이었다.어느 쪽으로든 걸으면 역사를 만나고,어디에서 멈추든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정동이고 덕수궁 돌담길이다.
연인과 덕수궁 돌담길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
그런데 덕수궁 돌담길에는 언제부터인지 흥미로운 도시 전설이 하나가 만들어져 내려왔다."덕수궁 돌담길을 연인과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다.이런 속설은 언제,어떤 배경 속에 탄생하였을까?가장 흔하게 들리는 이야기는 경성재판소 청사의 등장이다.1928년에 덕수궁 남쪽 돌담길 맞은편 언덕,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재판소 청사가 문을 열었기 때문에 이혼하러 법원에 가는 부부들이 돌담길을 걸었던 데서 그런 이야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예컨대,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미디어허브 서울> 2018년 6월 15일 자에는 "1928년 경성지방법원,고등법원 등의 청사 확장 및 이전과 함께 법원 단지가 되어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은 연인은 헤어진다는 풍문을 낳기도 했다"는 글이 나온다.사실일까?
이 속설의 기원을 알기는 어려우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매우 근거가 부족하다.이 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재판소 '평리원'이 문을 연 것은 1895년이었다.1898년 9월에 발생한 '고종커피독살기도사건'의 주모자와 관련자 수십 명에 대한 재판이 열렸던 곳도 이곳이었다.1928년에는 같은 장소에 새로 건물을 신축하고 경성지방법원과 고등법원 등 사법 관련 기관이 대거 들어서면서 명실상부한 법원단지가 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부부가 이혼할 때 법원의 결정이 필수적이지도 않았다.부부가 헤어지기로 결심해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관공서 호적 담당 부서에 제출하면 절차가 완료되었다.굳이 재판소에 갈 필요가 없었다.
재판은커녕 이혼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아내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법적 보장 장치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조차 매우 늦었다.1963년에 이르러서다.서울가정법원이 신설된 해다.당시 호적법 개정은 협의이혼 신고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개정 이유는 그 취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협의이혼 신고에 대하여 관계 공무원으로 하여금 협의의 진정성립 여부를 심사하게 하여 일방당사자의 자의에 의한 신고로 일어나는 피해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진정성립 여부를 심사"한다는 것은 당사자의 이혼 의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다시 말해 그전에는 배우자 한쪽이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혼신고를 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고,이를 막기 위한 장치가 1963년에 처음 마련된 것이었다.
이런 시절에 이혼을 확정하기 위해 이혼을 앞둔 부부가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법원을 찾아가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1960년대 중반에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도시 전설을 기록한 자료나 언론 보도,심지어는 그런 전설을 언급한 문학작품도 없다.
'도시전설'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심지어 1950년대까지 덕수궁 돌담길은 '사랑의 언덕길'로 불렸다.1956년에 영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자유부인>의 동명 원작 소설(정비석,1954년 발표)에 나오는 내용이다.높은 담과 우거진 나무 때문에 외부 시선이 가려져 젊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러 찾아오기에 안성맞춤인 장소가 덕수궁 돌담길이었다.이별의 돌담길이 아니라 만남의 돌담길이었다.1900년대 초반에 덕수궁 일대를 표현하는 용어인 '랑데뷰거리'의 연속이었다.
덕수궁 돌담길이 이별과 연결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이었다.정두수 작사,한산도 작곡의 '덕수궁 돌담길'의 인기였다.진송남이 부른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