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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주말]
니체 이어 세네카 열풍
왜 지금 철학에 빠졌나
“당신은 누구에게나 시간을 내주면서,자기 자신에게는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그것이 당신의 삶이 짧은 진짜 이유다.”
두 아이 아빠이자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박모(48)씨는 요즘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문장을 읽고 있다.그는 “200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 한 말인데도 지금 상황에서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가 많아 놀랍더라”며 “‘이래서 철학자는 다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AI가 무엇이든 답해주는 시대,2000년 전 로마 철학자의 말이 2026년 대한민국을 달구고 있다.스토아 철학자 세네카 이야기다.그의 사상을 현대인의 삶에 맞게 풀어낸 책‘세네카,오늘을 빼앗기고 있는 당신에게’는 출간 이후 9월 넷째 주까지 누적 6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예스24 기준)에 올랐고,이미 발간된 세네카 원전 완역본들도 덩달아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런 현상이 비단 세네카만의 것은 아니다.최근 4~5년 사이 철학자의 이름만 바뀐 비슷한 열풍이 반복되고 있다‘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불러온 쇼펜하우어 신드롬‘위버멘쉬(Übermensch·초인)’란 말을 익숙하게 만든 니체 열풍이 대표적이다.철학이 학문적 탐구의 대상을 넘어,현대인의 일상적인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방향을 찾는 콘텐츠로 소비되는 이른바‘철학 소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업계에선 철학 소비 시대의 시작을 2021년 출간된 대중 철학서‘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로 보는 경우가 많다.국내에서만 30만부가 팔리며 그해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에 오른 책이다.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자는 “2017년 기시미 이치로의‘미움받을 용기’를 중심으로 아들러 심리학 열풍이 시작됐고,한동안 에리히 프롬과 융에 이르기까지 심리학 전반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며 “2021년‘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필두로 서양 철학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했다.2021년은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일상의 불확실성이 커지던 시기였다.사회적 거리 두기로 일상이 위축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지자,오랜 세월 축적된 철학자의 지혜로부터 삶의 방향과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는 독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실제‘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소크라테스 사상을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등 여러 유명 철학자의 사상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제목만 대중에게 친숙한 소크라테스를 내세웠다.같은 해 출간된‘스토아 수업’과‘필로코믹스’도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어려운 철학 사상 대신,철학 지식과 통찰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그럼에도 독자들은 철학자의 사유를 접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경기도에 사는 직장인 이모(43)씨는 “자기 계발서는‘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드러내 놓고 가르치는 느낌이 강하다면,철학책은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위대한 철학자의 생각을 접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위로가 있다”며 “지적인 만족감도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이런 흐름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핀 것이 쇼펜하우어다.쇼펜하우어는 인간 삶을 욕망과 고통의 문제로 바라본 철학자다.그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책들은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는 태도를 강조한다.이런 메시지가 현대인에게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의 피로를 덜어주는 조언으로 읽힌 것이다.여기에 한 배우가‘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는 모습이 방송에 공개되면서,그 인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는 “어느 시대든 철학 열풍의 시작에는 쇼펜하우어가 있다”며 “‘인생은 다 괴롭다.너만 괴로운 게 아냐’라고 이야기하는 쇼펜하우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대안이 없는 것 같은 시대에 강한 위안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쇼펜하우어에 이어 니체 바람이 분 것도 안 교사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했다.쇼펜하우어를 읽다 보면‘인생이 이렇게 괴롭다면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닿게 되는데‘주눅 들지 말고 위버멘쉬(Übermensch),즉 초인(超人)처럼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라’는 니체의 철학에서 그다음 답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니체 관련 대중서는 남이 정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스스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가라는 메시지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2021년부터 철학 전문 서점‘소요서가’를 운영해 온 윤상원 대표는 “최근 주목받는 철학자들의 사상이 처음 등장한 배경을 보면,공동체가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개인이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 삶을 헤쳐 나갈 것인가를 고민한 경우가 많다”며 “이런 주제가 오늘날에도 인기를 끄는 건 그때와 비슷하게 개인이 경제적·심리적 압박을 견디며 자기만의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세네카일까.세네카를 대중적으로 해석한 책들은‘타인의 요구와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현재 주어진 시간과 삶에 충실하라’고 강조한다.교보문고 담당자는 “세네카 책 구매자를 연령별로 분석해 보면 40·50대 구매자(57.1%)가 압도적으로 많다”며 “인생의 전환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세네카에게 얻는 교훈이 크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세네카만의 인기라기보다‘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 스토아 철학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최근 스토아 철학을 실천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명상록’판매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안 교사는 “스토아 철학은 생존 자체가 절박한 사회보다는 일정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이룬 사회에서 인기가 있다”며 “스토아 철학이 로마가 최대 전성기를 지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던 시기에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선진국에 진입한 뒤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사회의 분위기와 결이 맞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스토아 철학이 크게 유행했다.스토아 철학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라이언 홀리데이의‘돌파력’이 45국에서 200만부 이상 팔리는 등 스토아 철학 관련 서적의 인기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됐다.실리콘밸리 창업가와 경영자는 물론 미 프로 스포츠 선수와 지도자들 중에서 스토아 철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는 이도 많아졌다.일주일 동안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 등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직접 실천해보는‘스토아 위크’참여도 늘었다.
다만 이런 흐름이 특정 시대와 문제의식 속에서 나온 철학자의 사상을 맥락에서 떼어내 단순한 인생 조언으로만 소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독자들이 철학에 흥미를 갖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지만,자칫하면 오독의 가능성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철학으로 분류되는 책 중에는 철학자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책보다,철학자의 이름을 빌려 삶의 조언을 전달하는‘철학 버전 자기 계발서’에 가까운 책이 적지 않다”며 “이렇게 되면 니체든 쇼펜하우어든 세네카든 사실상 큰 차이가 없어진다”고 했다.
소요서가 윤 대표는 “이런 책들이 단순한 유행에 그치지 않고 철학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좋은 입문서가 돼,독자들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안 교사는 “프로야구를 보는 것과 직접 야구를 하는 것이 다르듯 철학도 마찬가지”라며 “짧게 정리된 메시지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시간을 들여 원전을 읽고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 보는 과정이 있어야 철학에서 잠깐의 위안을 얻는 것을 넘어,삶의 어려움을 견디는‘마음의 근육’까지 키울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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